【기획】한국 대학들이여! 성찰의 시간을 갖자①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은 지난 2009년 8월28일자 중앙일보에 ‘대학의 발전과 참된 의식’이라는 시평을 썼다. 주요 골자는 학생은 주인의식을 갖는 것은 좋으나 과도한 주인의식은 오히려 학교발전에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박용성 이사장이 썼던 시평의 주요 내용을 보면

1) 주인의식은 자발성과 참여를 이끌어 낸다. 그러나 주인의식을 갖는 것과 주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주인의식을 갖는다고 해서 실제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 대학 사회에 경계를 넘어서는 과도한 ‘주인의식’이 퍼져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진다. 국·공립 대학에는 대학을 설립한 국가와 공공기관이, 사립대학에는 학교법인이 있다. 그럼에도 교수·교직원·학생들이 각자 대학의 주인이며, 주인의 권리가 그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3) 대학이 열린 공간이라고 한들 모두가 주인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운영 주체가 확실히 서지 않으면 학교도 튼실하게 발전하기 어렵다. 지금이라도 학교법인과, 교수를 포함한 교직원, 학생 간의 관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4) 학생은 학교가 제공하는 교육 서비스를 받는 대상이다. 피교육자로서 그에 합당한 주장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경계를 넘는 주장이나, 지나치게 강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은 대학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박용성 이사장의 논리는 철저한 기업적 사고로 무장돼 있다. 그런 기업적 사고가 잘 나타나 있는 문구가 “대학의 의사결정권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대학의 특수성이 있긴 하지만 기업에 견준다면 학교법인이 이사회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 이사장은 주주 대표 격이고, 학교법인 이사진은 기업의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와 같다. 이렇게 보면 대학의 의사결정권은 학교법인에서 비롯되고, 운영 주체는 학교법인의 이사회로 보는 게 논리적으로 타당하다.”는 논리다. 그러니 “학교의 주인은 법인이다”는 말이며 “의사 결정은 법인에서 이뤄진다”고 단정한다.

박용성 이사장이 굳이 선을 그으려고 애쓰는 ‘누가 학교의 주인인가’ 자문자답은 교육기관 재단 이사장으의 정서라기보다는기업의 오너로서의 정서만이보인다. 흔히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는 말은 학교의 본질을 뜻한다. 학교는 학생의 학습권이 가장 우선시 되는 조직이다. 학습권으로 인해 학교의 모든 행정과 역할이 배분되는 시작이 된다는 의미의 기능적 상징성에 초점이 맞춰진 말이다. 박용성 이사장의 논리대로라면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 대통령, 국무회의, 국회의원 등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고 말하고 있다.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이라고 표현도 한다.

박용성 이사장의 학교의 주인은 법인이라는 내용을 이해하려면 우리 고등교육의 왜곡된 법체계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유럽이나 제3세계의 나라들 사이에는 아예 사립대학이란 개념 자체가 없는 반면에, 우리나라는 고등교육에서 사학의 비중이 세계적으로 가장 높을 뿐 아니라 사학을 특정인의 소유물로 보는 천박한 관념이 유독 여전히 강하다. 더욱이 우리의 사립학교법은 대학을 학교법인의 영조물로 보아 그것의 독자적인 법인격은 물론 정체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대학이 법적으로는 학교법인의 피조물이지만, 현실에서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사립학교법상 학교법인이 대학의 소유주이기는 하지만, 대학은 교육과 연구라는 고유한 목적을 갖는 독자적인 조직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어떤 대상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를 주인이라고 한다면, 교수·교직원·학생은 당당히 학교의 주인이다. 그러기에 사립학교법도 적어도 그 목적에서는 교육의 “자주성을 확보하고 공공성을 앙양함으로써 사립학교의 건전한 발달을 도모한다”고 밝히고 있다.

아무리 법적으로 대학의 실체성을 부인한들, 대학은 이미 존재만으로도 스스로 주인이다. 법적으로는 학교법인이 앞서지만, 존재론적으로 대학은 완결적인 하나의 전체다. 이것을 현행의 법체계가 부정하고 있기에 암묵적으로 인정받지 않을 경우 대학은, 그 구성원들은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되면 학교법인 측은 이에 맞서 자신이 주인이라고 외쳐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현실과 법 사이의 괴리를 걷어내야 한다. 대학의 정체성을 인정해 그 사단적 성격을 사립학교법에 반영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대학이라는 이 특수한 인간 생태계는 주인의식을 갖고 발전의 엄청난 동력을 발휘할 것이다. 학교법인, 이사회, 이사장도 ‘참된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 학생이 내는 등록금 위주의 학교 경영을 부끄러워해야 하며, 학교법인이 대학을 위해 존재함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 교수 글중에서>

박용성 이사장의 ‘이사장 주인론’과 ‘기업식 운영론’은 대학의 민주주의와 이념, 그리고 학문의 고유성과 자율성을 부정하고 유린하는 위험천만한 주장이다. 박 이사장의 주인론은 교수, 학생, 직원으로 이루어진 ‘자유로운 학문공동체’인 대학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무서운 발상이며, 근대 한국 대학이 식민시대와 권위주의시대를 거치면서 힘겹게 쟁취해낸 대학 민주화의 전통을 뒤엎는 반역사적이고 퇴행적인 주장이다. 대학을 사유물처럼 취급하면서, 교수와 학생을 ‘피고용인’과 ‘소비자’로 보는 기업식 발상에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대학을 기업식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발상 또한 대학의 사회적 책무와 공익적 기능을 경시하는 시장지상주의자의 편협한 논리를 드러내고 있다. 대학은 기업이 아니며, 대학문화는 기업문화와 다르다. 기업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윤을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리집단인 반면, 대학은 사회를 이끌어갈 민주시민을 양성하고, 공익에 기여할 지식을 생산함으로써 공동체에 기여하는 공적 기관이다. 대학이 공적 목적을 위해서는 때론 사적 이익을 희생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게다가 장구한 역사 과정을 통해 축적된 학문적 지식은 인류의 자산이고 가치인 까닭에, 학문을 ‘상품’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현대자동차와 삼성반도체는 이윤이 나지 않으면 생산을 중단할 수 있으나, 철학·수학·경제학 등의 학문은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사실 삼성이나 현대가 경쟁력을 갖게 된 데에는 대학의 기여가 적지 않았다. 기업에서 일하는 대부분이 대학을 정점에 둔 한국의 교육제도가 배출한 인재들 아닌가. 반면에 한국의 기업이 대학에 제공한 재정적 기여는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대학의 기업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흔히 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 대학에서 지금 들려오는 것은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 일색이다. 시카고 대학 교수들은 공개서한을 통해 대학에 기업식 경영을 도입한 소넨샤인 총장에게 “마케팅에 근거해서 학문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 자체가 인간 정신에 대한 범죄행위”라고 경고하는가 하면, 하버드 대학 총장을 역임한 데렉 복은 대학의 기업화를 “파우스트의 거래”에 비유한다. 우리 대학도 시장의 욕망에 눈이 멀어 대학의 영혼을 파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성찰해보아야 시점이다. <강내희 중앙대 영문학 교수 글중에서>

박용성 이사장 논리에 또 하나의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학생은 학교가 제공하는 교육 서비스를 받는 대상이다. 피교육자로서 그에 합당한 주장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시평에서 말했다. “교육 서비스를 받는 대상이며 피교육자로서 그에 합당한 주장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박 이사장이 지칭한 서비스 대상자는 그가 좋아하는 비유인 기업으로 기준하자면 교육 서비스를 받는 소비자인 셈이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생산업체에서는 반영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기업윤리며 생존전략이다.

박용성 이사장이 중앙일보에 시평을 쓴 시점은 중앙대 진중권 교수의 재임용 탈락에 대해 학생들과 교수협의회에서는 강력히 반발했던 시점이었다. 결국 교수의 재임용 권한은 학교당국에 그 권한이 있는데 학생과 교수가 왜 월권적인 행동을 하냐는 것을 에둘러서 표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무슨 말인가. 교육 서비스 대상자로서 합당한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언제 써 먹을 수 있는 논리인가. 기업들은 소비자만족도를 실시하기도 한다. 그 설문에서 나타난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소비자의 만족도를 높이려고 애를 쓴다. 결국 중앙대라는 기업은 소비자의 의견을 들으려도 하지 않았고, 자발적으로 의견을 말했더니 그 의견마저 묵살한 셈이다.

학생들이 그 강의를 듣고 싶다고, 소비자가 우리는 그것을 원한다고 말해도 전혀 듣지 않고선 대학의 주인은 법인이며 기업으로 치자면 이사회라는 편리한 논리만으로 학교주인을 내세우는 이중적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배우고 싶은 과목을, 원하는 교수에게서 배울 수 있는 권리이자 권한이다. 당시 진중권 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한 것에 학생들이 이렇게까지 항의하는 것은, 학생들이 바로 이 가장 기본적이고 우선시 되는 권리를 박탈당했던 것이다. 학생들의 의견은, 소비자의 의견은 완전히 묵살 당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박 이사장이 말했던 “피교육자로서 그에 합당한 주장”에 대한 근거는 중앙대 재직 6년간 진중권 교수의 수업은 인문학과 미학 전반에 대한 해박하면서 깊이 있는 지식을 제공함으로써 독문학과와 문화연구학과 학생들에게 매우 높은 성취도와 만족도를 보여 왔었다는 게 대체적인 중론이다. 또한 타 학교 학생들에게까지 강의의 명성이 알려지는 등, 그가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는데 더없이 기여했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그럼에도 합당한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학교의 주인은, 소비자들의 의견을 잘 청취해 기업을 잘 발전시켜야 하는 이사회는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았다.

당시 중앙대교수협의회 성명서에서는 최근 몇 년간 참여지식인으로서 진중권 교수의 사회비판적 발언이 가지는 영향력과 박범훈 총장의 친정부적 활동의 관계에 주목한다고 제기하고 있다. 또한 이번 인사결정이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킨 총장의 성희롱 발언에 대한 진 교수의 정당한 비판이 있은 직후에 이루어졌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박용성 이사장의 논리가 타당성을 가지려면 이 때 피교육자로서의 합당한 주장을 이사회 차원에서 들었어야 했던 것은 아닌가. 주주의 대표인 이사장이 중앙대 기업의 발전을 위해 청취했어야 됐던가 아닌가 싶다.

또한 최근 2011년 사립대 수도권 50개 대학 가운데 지난해 ‘법정부담전입금’을 한 푼도 내지 않은 대학 8곳이 있었다. 그 중 한 대학이 중앙대이다. 법정부담전입금은 법인이 대학 교직원의 후생복리를 위한 연금, 건강보험료 등에 쓰기 위해 의무적으로 법인에서 학교회계에 내야 하는 돈으로, 관련법이 정한 최소한의 법정부담금이다.

하지만 대학들은 ‘학교 경영기관이 그 학교에 필요한 법인부담금 전액을 부담할 수 없을 때에는 그 부족액을 학교에서 부담하게 할 수 있다’는 예외규정을 악용, 학생들의 지갑을 털고 있다. 중앙대의 재단은 지난해 법정부담전입금 80여억원을 학생 등록금인 학교교비에서 충당했다. 한세대, 대진대, 가톨릭대, 협성대, 한국산업기술대, 덕성여대, 이화여대, 경희대, 그리스도대, 건국대 등은 142.3~100% 법정부담전입금을 낸 대학들이다.

중앙대 박용성 이사장이 쓴 시평의 ‘대학의 발전과 참된 의식’이라는 시평에서 학교의 주인을 갖는 것은 좋으나 과도한 주인의식은 학교발전에 바람직 않다는 그의 논지는 법정부담전입금에서는 예외가 되는 것인가.

중앙대 재단 입장에서는 법정부담전입금 말고 건물 신축 등에 투자된 “법인 전입금이 얼마였는지 아냐?”고 반문 할지 모른다. 기업의 논리로 하면 신축건물이 세워진 것은 중앙대 법인의 자산이 늘어나는 것이지 학생이나 교수의 자산 증가와는 관계가 없다.

직원 복지에 해당하는, 법인 자산과 관계없는 부담에는 매우 인색했음을 의미한다. 정말 기업에서 운영하는 대학은 뭐가 달라도 다름을 확연히 느끼게 한 대목이다. 중앙대의 발전은 박용성 이사장이 말하는 최고의결기관인 이사회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또한 그가 표현한 “과도한 주인의식” 부분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면 “넘치는 주인의식”이다. 넘치는 주인의식을 원하지 않고서는 학교발전의 에너지를 게속적으로 충당하기 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신자자유주의 20여년에 대학의 역할과 기능도 많이 바뀌었다. 세계 100대학 대학의 진입이 중앙대 박용성 이사장의 목표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대학은 직업교육의 기관으로 변모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중앙대 출신은 회계학을 다 공부해 현장에서 쓸 수 있어야 한다고 기업적 관점에서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 100대 대학은 기업에 인력을 제공하는 직업교육기관으로는 세계 100대 대학을 진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유는 세계 100대학들의 면면을 보면 기초과학 순수학문 등이 씨줄과 날줄 엮어지듯 엮어져 한 사회에서 필요한 인물을 배출해내는 면모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은 기업에서 필요한 사람을 길러내는 곳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낼 철학, 교양과 지적 수준의 인물을 만들어 낼 때 당연히 기업에게도 선순환의 영향을 미칠 것이라 본다. 한국 대학의 운영자와 관리자는 좀 더 긴 안목에서 대학의 발전방향을 논의해야하는 덕목이 절실하다. 성찰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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