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자 차마리사 학교를 송금선의 부친 송우영 개입해 장악

덕성여대의 시작과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훓다보면 한국의 근현대사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세상의 권력과 결탁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비판을 하면 군사독재시절 처럼 강압적으로 탄압하는 모습니 작은 한국 근현사다.

동토의 왕국, 덕성여대의 시작점

덕성여대를 관리하는 재단, 덕성학원이 본격적으로 개인의 것이 되기 시작한 것은 1952년 부터였다. 순회강연과 교육기금 모금을 통해 근화여학교를 세워, 여성교육에 힘썼던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여사(사진 왼쪽)가 건강상의 이유로, 1952년 덕성여대 이사장 자리를 사임한 것이다.

차미리사 여사가 이사장직을 사임한 이후 그 뒤를 이어 이사장이 된 것은 송금선씨의 부친, 송우영씨였다. 송우영씨 다음으로 이사장직에 오른 것은 송금선씨의 남편, 박준섭씨였으며, 그가 사임하고 난 후에는 송금선씨 본인이 이사장이 되었다. 덕성학원이 완전히 송금선 일가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덕성학원을 장악한 송금선 일가가 한 일 중 하나는, 덕성여대에 남은 차미리사 여사의 흔적을 지우는 일이었는데, 이는 송금선씨가 1940년에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덕성여자실업(근화여학교)교장이 되어, 학도병 모집글을 쓰고 창씨개명을 하는 등 친일에 힘썼던 부끄러운 과거를 왜곡, 미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덕성여대의 뿌리를 왜곡하고 재단을 사유화하는데 힘썼던 송금선씨 일가는 이사장직을 아들인 박원국씨에게 넘겼다. 어머니로부터 덕성여대 이사장직을 넘겨 받은 박원국씨는 재임 20년 동안 각종 비리를 저질렀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횡포를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동토의 왕국은 지속되었다.

▶송금선씨의 프로필& 친일활동

송금선(宋今璇, 일본식 이름: 福澤玲子(후쿠자와 레이코), 1905년 1월 15일 ~ 1987년 2월 24일, 한성부 출생)은 덕성여자대학교 초대 학장을 지낸 한국의 교육자이다. 아호는 남해(南海) (사진 왼쪽)

1919년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했다.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모교와 진주일신여자고등보학교,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1937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 가입하여 순회 강연을 다니면서부터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조선총독부의 방송선전협의회에서 친일 강좌를 맡았고, 조선귀족 부인들과 여성계 친일 인사들이 공동 조직한 애국금차회에도 가담했다.

전시체제 하에서 송금선의 친일 행적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활동하고 친일 잡지 《신시대》에 기고하는 등으로 계속된다. 친일 단체의 총본산격인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 가입하였고, 학병으로 지원할 것을 독력하는 연설 활동에도 적극 참가했다. 종전 직전 패전이 가시화되자 본토에서 최후의 1인까지 싸울 것을 독려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이 되기도 했다.

1940년 총독부의 지지 하에 차미리사의 뒤를 이어 덕성여자실업학교(현 덕성여자고등학교의 전신) 교장이 되었고, 1950년에는 차미리사와 함께 현 덕성여대의 전신인 덕성여자초급대학을 세우고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덕성여대 이사장을 지낸 박원국이 송금선의 아들이다.

▶ 송금선씨 친일 발간 자료

김삼웅 (1995년 2월 1일). 〈송금선 : "반도 지식여성들 군국어머니로 힘쓰자" (김민철)〉, 《친일파 100인 100문 - 친일의 궤변, 매국의 논리》.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704

조병래·임경구·전홍기혜 기자. “친일파 된 여성 교육선각자들 - <자료입수> 김활란 등 선각 여성 5인의 친일행적”, 《프레시안》, 2002년 3월 8일 작성. 2008년 2월 6일 확인.

분류: 1905년 태어남

1987년 죽음

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서울특별시 출신

덕성여자대학교

교수님을 교단으로 돌려달라! - 1990년, 기나긴 싸움의 시작

온갖 사학비리를 저지르며 재단을 자기 것으로 여긴 박원국 이사장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성낙돈 교수가 부당하게 재임용에서 탈락되고 만 것이다.

재단측은 성낙돈 교수가 근무성적이 불량하기 때문에 재임용하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그 이유는 사실이 아니었다. 성낙돈 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한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성낙돈 교수가 교수협의회를 결성하여 재단과 학교에 대해 비판적인 행동을 했으며, 개정사립학교법에 반대하여 재개정 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당시 개정된 사립학교법은 '개정'이 아닌 '개악'을 했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재단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졌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총장 권한이던 교수 임면권을 이사회로 이관한 것으로, 박원국 이사장과 재단은 이 사립학교법을 이용하여 재단에 비판적이었던 성낙돈 교수를 탈락시킨 것이다. 성낙돈 교수를 시작으로 비리사학재단들은 개정된 사립학교법을 이용하여, 자신들에게 비판적이라고 생각되는 교수들에게 재임용 탈락이라는 칼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댔다.

이런 상황에서 성낙돈 교수가 부당하게 재임용 탈락이 되는 것을 본 학생들과 교수들은, 성낙돈 교수의 복직을 요구하며 오랜 기간 동안, 수업거부와 항의농성, 단식투쟁을 벌였다. 2000년 초반까지 계속 되는 덕성여대 학내분규의 시작이었다. 학생들과 교수들의 복직투쟁에도 불구하고 성낙돈 교수는 아주 오랫동안 학교에 돌아오지 못했다. 성낙돈 교수는 재임용에서 탈락된지 10년째 되는 1999년에서야 겨우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97년, 학내분규와 교육부 특별감사

1990년, 성낙돈 교수가 부당하게 재임용 탈락된 것에 이어 1997년 2월에는 사학과 한상권 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되고 말았다. 1991년 한상권 교수가 교내 질서를 문란케하여 3개월 정직의 중징계를 받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기미가 없다는 것이 재임용 탈락 이유였다.

이 때 재단측이 한상권 교수가 교내 질서를 문란하게 만들었다며 근거로 든 것은 다름 아닌 1991년 성낙돈 교수 복직 투쟁이었다. 성낙돈 교수 복직 투쟁을 재단측은 교내질서 문란행위라고 여겼던 것이다. 또한 재단은 한 교수가 학내 행사 참여 및 학생지도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 등 근무 평가가 좋지 않았다며, 그 또한 재임용 탈락 이유 중 하나라고 밝혔다. 하지만 재단측의 주장과는 달리, 한상권 교수는 1996년 1학기 강의평가 평점 5점 만점에 4.05를 받았으며, 학계에 많은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에 학생들과 학계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성낙돈 교수에 이어 한상권 교수가 부당하게 재임용에서 탈락하게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학내구성원들은 학생총회를 열었다. 학생총회에 참석한 학생들의 수는 3,500여명, 전체 5,000여 명의 학생들 중 과반수 이상이 학생총회에 참석한 것이다. 학생총회에 모인 학생들은 부당하게 해임당한 교수들이 복직할 때까지 무기한 수업거부를 할 것을 결의했다. 본격적인 학내분규가 시작된 것이다.

학생들은 65일간 수업을 거부했으며 260여일간 총장실을 점거했다. 중앙운영위원회는 단식농성을 할 것을 결의했고, 20여일간 단식농성을 벌였다. 이런 학생들의 투쟁에 교직원과 노동조합도 함께하기로 했고, 그 결과 교직원노조, 조교협의회, 노동조합이 파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학생들과 교수들, 노동조합 등 학내구성원이 모두 뭉쳐 학내분규를 진행한 결과, 1997년 여름 교육부는 덕성여자대학교에 대해 특별감사를 벌였으며 박원국 이사장과 재단의 비리를 밝혀냈다. 교육부 감사기간 동안 밝혀진 이사장과 재단의 비리는 모두 146건으로, 그 당시 대한민국 곳곳에서 벌어진 사학비리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라고 할 수 있다. 교육부는 146건의 비리를 밝혀내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적하였다.

◇ 교육부 특별감사 주요 지적사항

-이사장이 대학행정에 사전지침을 통해 사전결재, 사후보고를 받는 등 학사간섭 자행

-교원 승진 시에는 이사장이 사전에 승진대상자를 결정하여 소수 인원만 승진시킴

(94년부터 3년 동안 승진대상자 90명 중 28명만 승진시킴)

-교무행정 전반을 이사장이 지시, 결정하고 ‘한문’ 담당교수에게 ‘한자’만 가르치도록 교육방법까지 간섭

-결산잔액을 다음년도에 이월사용하지 않고 전액을 대학특별사업 적립금 명목으로 83년부터 96년까지 312억원을 조성

-법인전출금은 94년부터 96년까지 3개년동안 128억원을 법정에서 정한 기준보다 부족하게 학교에 전출함

이렇게 교육부 특별감사에 의해, 그동안 저지른 비리가 밝혀진 박원국 이사장은 결국 해임조치를 받고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1997년의 학내분규는 학내구성원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1999년 교육부의 중재로 이문영 이사장을 비롯해 4명의 이사진이 파견되었고, 해임되었던 성낙돈, 한상권교수가 복직하게 되었다. 이로써 덕성여대 학내분규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001년 학내분규는 다시 시작되었다.

2001년, 사학비리가 다시 돌아오다

1999년, 교육부의 이사진 파견으로 학내분규는 잠잠해질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해임되었던 두 교수도 복직하게 되어, 이제 민주적인 학교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재단의 뿌리는 건재했다. 파견된 이사진이 남아있던 구재단측 이사들의 횡포로 인해 3년만에 이사직을 내놓게 된 것이다.

이로써 박원국 전 이사장이 학교에 복귀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2001년 대법원은 박원국 전 이사장 해임절차에 문제가 있다며 교육부의 해임결정을 취소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박원국 전 이사장이 다시 학교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학교로 돌아온 박원국 이사장이 맨처음으로 한 일은 눈엣가시 같은 교수들을 해직하는 일이었다.

교수협의회 소속이었던 중문과 김정남 교수, 남동신 교수 등 4명의 신임교수를 포함하여 5명을 해직했다. 그리고 이들 해직교수들이 담당했던 과목을 일방적으로 폐강시켰다. 5명의 해직교수들 중 남동신 교수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해직되고 말았다. 남동신 교수는 덕성여대 설립자인 차미리사 여사의 초상화 봉정식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총장의 경고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경고를 받은 것이 해임의 중요 사유가 되어 해직되었기 때문이다.

복귀한 박원국 이사장(사진 왼쪽)의 횡포를 인정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박원국 이사장의 복귀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2001년, 학내구성원은 다시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학생들은 4월부터 또다시 무기한 수업거부에 돌입했다.

학생들과 교수들은 교육부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고 집회를 열었다. 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은 릴레이로 철야 단식농성을 했으며 10월에는 학생대표자들과 교수협의회장도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일반 학생들도 단식에 참여했다. 같은 달 10월에 100인의 단식단을 발족하여 대규모 단식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노동조합도 학생, 교수와 뜻을 같이하여 10월부터 파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25명의 학내구성원들은 집단 삭발식을 했다. 언론들은 2001년 덕성여대 학내분규에 대해 대대적인 보도를 했고, 덕성여대 분규는 많은 국민들의 관심을 받았다.

학내분규가 계속되던 2001년 10월 25일 박원국 이사장은 임기 만료를 이유로 이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그 후 교육부는 4명의 관선이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1년, 관선이사도 임기만료로 물러나게 되었고 여전히 갈등의 불씨는 남아있다. <출처 : 민중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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