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5월 말쯤이었던 것 같다. 미국에 있던 나는 인터넷에서 한국 대학생들의 ‘반값 등록금’ 시위의 짧은 영상을 보았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학생시위와는 아주 달라보였다. 과거에 내가 봤던 선배나 동료들은 ‘무슨 무슨 전사’ 내지는 ‘무슨 무슨 선봉대’ 같은 티셔츠를 입고 머리와 팔에 붉은 띠를 묶고 거리로 나왔다. 때로는 양복과 와이셔츠를 갖춰 입고 몸에 태극기를 두른 이들도 있었다. 경찰에 끌려갈 때도 고개를 쳐든 채 조국통일이나 민중해방을 외쳤다.

그런데 내가 작년 5월의 영상 속에서 본 시위자들은 똑같은 대학생인데도 과거의 ‘애국지사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울부짖으며 끌려가고 있었다. 윗옷이 벗겨지고 사지가 들렸는데도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질러대는 그들의 모습, 속된 말로 ‘개 끌려가듯’ 그들은 그렇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렇게 ‘품격 없이’ 끌려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뻐근해졌다. 생각해보면 그 모습이 그 자체로 낯선 것은 아니다. 애국학생들이 멋지게 끌려가던 시절에도 민중들, 가령 노점상이나 철거민들은 경찰에 끌려갈 때 꼭 그렇게 끌려갔다. 그 멋진 민주화 운동의 시절에도 말이다.

대학생들도 이제는 영락없는 민중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노동자와 민중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라기보다 노동자와 민중으로서 싸우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비싼 학비를 벌기 위해 파트타임을 몇 개씩 뛰고, 그야말로 팔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팔려고 한다는데, 일반 민중과 구분되었던 집합 범주로서의 대학생이 해체되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도 했다. 나는 그 시위가 80년대의 시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면서도 그에 못지않은 힘을 가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인류의 보편적 대의를 내세우기 이전에 자기해방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 그리고 그런 대의 때문에 연대에 나선 사람보다 자기 해방의 과정에서 타자 해방의 중요성을 깨달은 사람이 훨씬 강력하고 질긴 투쟁을, 그리고 훨씬 강력한 연대를 추구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믿음이 잘못된 걸까, 아니면 내 눈이 잘못된 것일까. 여전히 내가 본 것, 내가 믿고 있는 것을 철회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지난 1년간 내가 예측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학등록금은 그 난리법석에도 불구하고 동결되거나 기껏해야 2-3%, 말 그대로 ‘내리는 시늉’에 그쳤다. 게다가 감사 결과 대학은 탈법과 편법을 동원해서 엄청난 적립금을 쌓아두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액수의 등록금 인상분을 학생이 아니라 교수와 직원들의 급여인상, 그리고 심지어는 재단으로 빼돌리기까지 했음도 드러났다. 내가 놀랐던 건 그런 비리 사실이 아니라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조용한 대학가이다.

대학의 배신. 오랫동안 고등 지식의 생산과 유통, 연구와 교육을 독점하다시피 해 온 대학이 돈으로 앎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고, 한 발 더 나아가 앎을 돈 버는 수단으로 만들었는데, 왜 거기에 대한 응징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종종 나는 내 강연에 참석한 대학원생이나 대학생들의 생활에 대해 종종 듣는다. 말 그대로 모두가 안간 힘을 쓰며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처음엔 어느 대학 신입생이 자신은 꽤 먼 거리도 가급적 걸어 다니고 식비를 아끼기 위해 끼니도 거를 때가 있다고 했을 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출받은 학자금을 갚기 위해 4천원 남짓의 시급을 받고 90시간 이상을 일한다고 했을 때, 정말이지 농담하는 줄 알았다. ‘농담이지?’하는 내 표정을 한심한 듯 보는 학생들을 보고나서 깨달았다. 오늘날의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 즉 대학은 과거와 같은 앎과 배움의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앎의 자격증을 명분으로 젊은이들의 등골을 빼먹는 악성 사채업자 패거리들 같았다.

캐나다 퀘벡주에서는 이십만 명 가까운 대학생들이 3개월 넘게 총파업을 벌이고 있다. 지난주 <위클리 수유너머>에서 ‘총파업’을 특집으로 다룰 때도 계속해서 했던 말이지만, ‘총파업’은 노동자들이 공장을 상대로 벌이는 그런 파업과는 다르다. 그것은 현재의 체제를 견딜 수 없는 누구나, 그 체제의 부분이기를 거부하는 비타협적 행동이다. 퀘벡의 많은 학생들이 그토록 오래 파업을 벌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작년에 한국의 대학생들이 ‘개 끌려가듯’ 끌려가며 울부짖었던 그 이유와 다르지 않다. 대학등록금 말이다.

퀘벡 정부는 앞으로 5년 동안 대학등록금을 75% 정도 올리겠다고 밝힌 모양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오른 액수는 우리의 ‘반값 등록금’에도 미치지 않는 액수다. 지난 석 달 동안 학생들은 수업을 철저히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200회가 넘는 시위를 벌였다. 퀘백은 캐나다에서도 가장 낮은 등록금을 내는 지역이지만 학생들은 이런 등록금 인상이, 대학의 성격 변화에 있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5월 1일 학생들의 메이데이 총파업까지 이어지면서 일단 퀘백 정부는 양보안을 내놓았다. 등록금 인상안을 계속 추진하지만 일단 내년에는 다른 청구비용을 줄여서 결국 고지서에 찍히는 총액은 증가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또 대학의 예산지출을 조사할 임시위원회에 학생들의 참여를 허용하겠다고 했다.

퀘벡주 대학생 총파업의 결론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최소한 자기 대학의 배신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한국의 대학사회는 어떤가. 참 가슴이 답답하다. 학생이 수업료를 마련하기 위해 파트타임을 뛰어야 하고 그 때문에 수업에 제대로 참석할 수 없다면 그곳은 더 이상 공부를 하는 곳이 아니라 앵벌이 돈을 ‘삥뜯는’ 곳이다. 돈을 요구하며 학업을 가로막는 대학, 가난한 이들의 수업 참석을 사실상 가로막고 있는 대학을 응징하는 길, 퀘벡주 학생들은 ‘수업 거부’를 택했다. 수업 참석을 막으니 수업을 거부할 밖에.

정말 누군가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한국의 대학생들에게는 달리 무슨 좋은 수가 있는지. 선거? 서울시립대를 보라고? 천만에! 나는 선거를 잘해서 현명한 시장이 등록금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하고 문제 해결에 나섰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학생들의 절박한 목소리와 행동이 서울시장을 바꾸는 주요 계기 중 하나였을 것이다. 지금 ‘절실한’ 것은 정치공학이 아니라 ‘절실함’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말과 행동이다. 그것이 내가 1년 전에 보았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1년 전에 보았던 진실이다. 그것이 내가 1년 전에 보았던 대학생 민중이다. <본 칼럼의 주장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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