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본 천직이 의사" 화제

의과대학 시절 신경해부학 노트정리 일부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즉, 전환점을 기회로 만들어낼 수 있는 때가 있다. 그런 기회를 아무 때나 스스로 만들 수 있다면 가장 좋다. 그러나 스스로 만들지 못한다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좋아질 수 있는 기회 즉, 좋은 때가 왔을 때 잘 잡기만 해도 성공할 수 있다. 반대로 나쁜 때가 오더라도 열심히 고민하고 노력하면 더 좋은 기회로 만들 수도 있다.

학창시절에도 그런 전환점이 될 만한 좋은 시기들이 있다. 그 시기마다 현명하게 대처해서 좋은 기회로 만든다면 승리하는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다. 반면에 그런 기회를 날려 버린다면 아무런 변화나 발전이 없이 정체된 학창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에게 노트정리는 공부 인생에 있어 터닝 포인트와도 같았다.

나는 사실 중학교 재학시절까지만 하더라도 공부를 잘하지도 그리 즐겨하지도 않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한때 내 꿈은 PC방 사장이었다. 매일 컴퓨터 게임을 공짜로 즐길 수 있던 카운터의 사장이 너무 부러웠고 커서 꼭 PC방 업주가 되리라 철없는 꿈을 꾸었던 적도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만 해도 PC방이 귀했던 시절이라, 방과 후 불이 나도록 달려야만 한자리 차지하고 친구들과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공부? 그건 판검사를 꿈꾸는 아이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의 주옥같은 말씀을 귀담아 들으며 공부하는 수업시간보다 급우들과 복도축구나 잣치기 등을 할 수 있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을 더 간절히 기다렸던, 그 덕에 거의 매일 학생 주임 선생님께 혼이 나서 복도에 무릎을 꿇어 않은 채 손을 들고 벌을 받아야만 했던 장난기 가득한 말썽꾸러기 학생이었다.

고교시절 작성했는 생물 노트, 귀의 구조

허나 어느 날부터인가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노는 것이 지겨워졌다기보다 무언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사명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수십 년간 아들만 바라보고 뒷바라지하며 살아왔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신과는 다르게 자식만큼은 많이 배우고 배불리 먹고 살기를 원했던 나의 어머니는 아들의 성공을 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고 또 원했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무척이나 공부를 잘했던 수재였다. 고향에서는 늘 1등을 도맡아 했었고, SKY 대학 수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수학이라는 학문이 막대한 부를 안겨주지는 못했고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집안 살림은 어려웠다. 하지만 늘 자식만큼은 최고로 키우고 싶어 했다. 따뜻한 집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이것저것 누리며 편하게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타 부모들과는 다르게 단 한순간도 나에게 ‘공부하라’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들이 행여나 TV를 보거나 컴퓨터를 하고 있으면, 늘 먼저 수학 문제집을 펼치시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 모습은 오히려 노력하지 않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으며 스스로 그 필요성을 깨닫게끔 만드셨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들은 내게도 불현듯 인생에서 한번쯤은 ‘공부‘라는 것을 미친 듯이 해보면 어떨까 고민하게 만들었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장난꾸러기 개구쟁이 이미지를 점차 벗어나 공부하는 모범생 이미지로 탈바꿈하게 했다.

막상 책상 앞에 앉아 생각해보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여태껏 공부라고 해봐야 시험 전 1~2주정도 프린트물 위에 낙서하던 것이 전부였던 내가 비 시험기간에 그것도 아무런 도움 없이 체계적인 공부를 한다고 덤벼댔으니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을 그렇게 방과 후 혼자 교실에 남아서 책과 씨름했지만 기초도 없었고 학습 노하우도 전무했던 내게는 성취감이나 만족감보다는 답답함과 막막함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학교 성적도 그에 따라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비평준화 고교에 진학한 후 성적은 100등 밖으로 떨어졌다. 내 인생 처음으로 받아본 세 자리 등수 성적표였다. 그 충격으로 공부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 홈페이지 관리부에 들어가 컴퓨터 기술을 미친 듯이 배웠고 친구를 따라서 밴드에 들어가 악기를 연주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답답한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도 한 줄기 빛은 있었다. 평소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며 늦은 새벽까지 매일같이 공부하시던 어머니의 모습 속에서 나는 작은 힌트를 얻었다. 늘 어머니는 공부하며 무언가를 노트에 기록하고 계셨고, 그 자료를 모아두었다가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마다 활용하셨다.
고교시절 심장, 순환에 관해 정리한 노트

의과대학 재학시절 심장 질환에 관해 정리한 노트

고교시절 정리했던 눈의 구조

공부를 하면서 무언가를 기록하는 일은 지루하지도 않을뿐더러, 잘 정리된 노트는 나중에 성취감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16살 되던 해 낙엽이 지던 어느 가을 날, 만 원짜리 연습장 한권과 교과서, 그리고 볼펜 한 자루와 함께 내 인생의 기나긴 공부와 그 공부를 도왔던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노트정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았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공부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고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앞섰다. 매일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장시간 무언가를 적어야 하는 고통에 너무나 힘들었고 눈에 띄는 수확이 없어 포기를 수없이 고민했었다. 하지만 노트정리는 분명 나를 성공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계절이 지나고 내 책상에 꽂힌 노트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성적도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세 자리 등수이던 성적은 어느덧 두 자리 숫자로 돌아왔고, 그 다음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전교 1등을 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노트정리의 무한한 매력 속에 푹 빠져 신경외과 전공의 생활 중인 지금까지도 그 녀석과 함께 내 미래를 위해 걸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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