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현 전국교수노조 대외협력위원장(이화여대 교수) 
위대현 전국교수노조 대외협력위원장(이화여대 교수)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은 그의 저서 화석 자본: 증기력의 발흥과 지구온난화의 기원(Fossil Capital: The Rise of Steam Power and the Roots of Global Warming)에서 요즘 유행하는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개념이 결과적으로 기후변화의 책임을 그 진짜 범인인 생산수단의 소유자들”, 즉 자본가 계급이 아닌 하나의 종 전체, 말하자면 인류(the anthropos)”에게 돌린다는 점을 공격적으로 비판한다. ‘인류세를 주장하는 자들은 기후변화의 원인으로 인류의 본성을 들먹일 수밖에 없으며, “인류라는 종 내부의 분열”, 즉 계급분화를 그 논의로부터 삭제한다. 그러나 그 경과를 살펴보면, 화석연료의 대량 연소로 인간에 의해 기후변화가 발생한 것은 어디까지나 철저히 계급적 성격을 가지는 사태였다. 역사적 진실은 서구의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자본가들이 증기에 투자했고 화석 경제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고, 현재의 화석 경제를 열차에 비유한다면 그 이해관계가 여전히 이 열차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게 된 부분적 이유를 인간사 영역에 자연과학자 공동체가 비논리적으로 개입하였다는 지점에서 찾는다. “지질학자, 기상학자와 그 동료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런 종류의 사건들을 다루는 데 적합한 능력을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류세는 차라리 의도적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작위로 탄생한 이데올로기며, 기후변화 분야에서 자연과학이 독점적으로 우세하게 되면서 발생한 부작용이다.” 게다가 이러한 인류세라는 개념적 오류는 그저 이 호사가들의 노리개로만 머물지 않는다. 이렇게 기후변화는 일단 탈자연화되지만(denaturalised) 그 원인이 인간의 내재적인 특성에서부터 도출됨으로써 바로 그 즉시 재자연화되어 버린다(renaturalised). 자연은 아니지만,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 원인인 이상 다른 대안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이러한 주장의 객관적 효과는 운동을 마비 상태로 이끌 뿐이다.”

이러한 식의 전개가 기후변화와 관련해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력이 고도화되고 사회적으로 조직화된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는 점점 더 복합적인 성격을 띠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 인자와 과학기술적 인자이렇게 나누는 것이 도대체 가능하다면 말이지만가 복잡하게 얽히고, 이는 한동안 자신들의 전문 분야에만 틀어박혀 있던 자연과학자들과 기술공학자들 중 일부를 그 학문적 경계선을 넘어 이들 문제에 개입하도록 부추긴다. 이러한 현상 자체는 어느 정도는 긍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사회적 문제와 과학기술적 문제를 칼로 자르듯 나누는 이분법적 접근은 현실적으로 더 이상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부정적인 효과를 낳는다면 그렇게 잘못 개입하느니 차라리 개입하지 아니하느니만 못하다.

이러한 예는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어느 저명한 생물학자는 한 회사의 홍보물에서 이렇게 말한다. “AI와 전쟁을 하려고 그러는지 저는 이해를 못 합니다. 자연에서는 가장 완벽한 생물이 혼자 살아남는 게 아니라 웬만하면 살아남아요. 완벽하게 훌륭할 필요가 없다, 그게 자연이거든요.” 옳으신 말씀이다. 가장 적합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은 틀렸다. 그저 있을 만한 것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 범주 규정부터 잘못되지 않았나? AI, 즉 인공지능이 인간 외의 기타 자연의 산물인가? 이름에 인공이 포함되는 이상 그것을 설명하는 데에 자연만 들먹거리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부적절하다. 실은 바로 그 때문에라도 그는 이해를 못 합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애당초 그가 적용하려 시도하는 범주가 이 사태의 해석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떠한 유효한 통찰도 제공하지 못하는 그가 여기서 자연을 운운함으로써 발생하는 그 객관적 효과란 결국 인공지능에 대한 사회적 의제를 자연화예를 들어 자본가들이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통해 배달노동자들에게 휘두르는 사회적 권력을 은근슬쩍 은폐한다하고 자신의 권위를 팔아 대중의 해당 기업에 대한 인상을 제고시키는 것자연운운하며 친환경적 인상을 전파한다; , ‘그린워싱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실은 AI와 전쟁을 하려고 그러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엄청나게 새로운 인식의 틀이 필요한 것조차 아니었다. 이미 19세기에 마르크스(K. Marx)자본론1권을 통해 기계가 도입된 때로부터 비로소 노동자는 자본의 물질적 존재형태인 노동수단 자체에 대해 투쟁하게 된다고 적었다. 왜냐하면 생산수단의 이 특정 형태[기계]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물질적 기초이기 때문에 그 생산수단에 대해 도전한 것이다.” 인공지능은 이러한 기계의 일종, 그 최신작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사회라는 생산력에 적대적인 생산관계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AI와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크리스토퍼 코드웰(Christopher Caudwell)에 따르면, 이러한 범주 오류의 배후에는 자본주의적 세계관의 위기가 존재한다. 물리학의 위기(The Crisis in Physics)에서 그는 이렇게 지적한다. “이데올로기의 서로 다른 부문 내에서 전문화와 기술적 능률이 점차 증가하지만, 이는 부문들 간의 무정부성과 모순을 또한 증대시킨다. 이러한 경우에 보수주의가 취할 수 있는 대안적 태도는 세 가지이다: (a) 자신의 좁은 정원을 벗어난 모든 이데올로기의 영역에 대해서 신비주의적인 실증적 태도를 취한다(에딩턴; Eddington); (b) 다른 모든 형태의 생각을 자신의 좁은 영역 내의 지극히 한정된 범주들에 폭력적으로 환원시킨다(프로이트; Freud); (c) 다양한 전문화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냥 뒤죽박죽인 채로 남은 절충주의. 이는 스스로의 세계관 그 자체를 부정하고 좌절시키는 일종의 세계관으로 귀결된다(웰스; Wells).” 자신들의 전문 분야에만 틀어박혀 있던 자연과학자들과 기술공학자들 중 일부가 그 학문적 경계선을 무리하게 넘으려 들 때 대부분은 폭력적 환원을 선택한다. 그 결과는 사회적 의제에 대한 무모한 자연화이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종합적인 세계관, 즉 실천과 전 전선(all fronts)에서 접하는 하나의 살아있는 이론(a living theory)”이 필요한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 내의 계급 간 균열이 발달하면서 주체가 객체로부터 격리되어 이러한 종합이 통상적으로 불가능하다. 자본가 계급은 자연과 관계하면서 마치 신과 같이 군림하기 때문에 노예처럼 그에게 복종하는 객체와 욕망을 가지고 활동적이며 자발적인, 즉 어떠한 법칙에도 종속되지 않는 사람인 주체밖에 상상할 수 없다. 반면에 종합적 세계관을 탄생시킬 객관적 조건을 갖춘, 자연과 실천적으로 접촉하는노동자 계급은 프롤레타리아 사회그 존재 조건 탓에 의식으로부터 배제된 사회로 변해간다.” 바로 공산당선언에 나오듯 한 시대의 지배적 사상은 늘 지배 계급의 사상이었을 뿐이다.” 사상적 교착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이 균열을 넘으려는 주체의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학자들의 사명은 어설픈 사회공헌또는 봉사의 탈을 쓰고 자신의 좁은 영역 내의 지극히 한정된 범주들을 소위 학문적 권위를 통해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계급투쟁의 장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는 엥겔스(F. Engels)가 라브로프(P. L. Lavrov)에게 보낸 18751112일자 서신에 적은 바와 같다:

만약 이 사회가 그 자체의 존재 법칙에 따라서 이미 너무나도 막대한 생산량을 더 계속 증가시켜야만 한다면, 그리고 그 때문에 매 10년마다 생산물뿐만 아니라 그 생산수단조차 대량으로 파괴하는 행위를 반복해야만 한다면, 도대체 거기에다 대고 생존경쟁(struggle for existence)’ 운운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진짜 생존경쟁은 오로지 생산하는 계급이 지금껏 생산과 분배에 대한 통제권을 독점하여 왔지만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할 능력조차 없는 계급으로부터 그 통제권을 빼앗는 투쟁뿐이다. 그러나 이는 바로 사회주의 혁명이다.”

노동자 계급의 계급투쟁에 함께 함으로써만 현재를 극복할 학문적인 기초를 획득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자기 분야 학문의 실질적 발전 또한 가능하게 된다. 그 외에는 모두 어김없이 거짓이다. ()

 

※ 본 기고의 내용은 본지의 편잡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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