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矛盾)이라는 단어의 유래는 매우 유명하다. 중국 초(楚)나라의 상인이 ‘창’(矛)과 ‘방패’(盾)를 팔면서 “이 창은 어떤 방패로도 막지 못하는 창이며, 이 방패는 어떤 창으로도 뚫지 못하는 방패”라 해 어떤 사실의 앞뒤, 또는 두 사실이 이치상 어긋나서 서로 맞지 않음을 이르는 표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세상 살면서 모순적인 상황을 자주 목격한다. 책임은 다하지 않고, 이익만을 쫓으려 할 때나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일을 추진할 때 이러한 모순은 자주 드러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순이어도 모순마다 각기 무게와 차원이 다르다.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경우와 사람을 키우는 교육에 관한 모순의 결과는 매우 치명적이며, 그 후유증이 쉽게 끝나지 않는다.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대표적 모순에는 사고가 난 배의 승객을 구해야 하는 선장이 가장 먼저 줄행랑을 쳐 수많은 청춘들을 진도 팽목항에 수장시킨 세월호 선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직업과 역할의 모순이다.    

꿈과 끼를 찾아주겠다는 ‘자유학기제’가 맞나요?

또다른 경우인 교육적 모순 사례를 보자.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부르짖고 있다. 그 일환으로 중학교 ‘자유학기제’를 출범 초기부터 주창해왔다. 중학교 2학년 1학기까지 세 학기 중 한 학기는 시험을 보지않고 현장체험·토론·진로탐험 중심으로 운영해 학생들의 꿈과 끼를 찾아주겠다는 취지이다. 시험에 찌든 아이들의 숨통을 틔워주고 창의성·자율성을 살찌우기 위한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시범사례를 거쳐 2016학년도부터는 전국 중학교에서 일제히 시작된다. 중학생을 가진 학부모라면 당연히 골똘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런데 중학생 자녀의 자유학기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을 하던 학부모에게 대학을 다니는 큰 아들이 있었다 치자. 요즘 큰 아들은 대학에 가서 시위만 하다가 오곤 한다. 큰 아들은 부모에게 “정부에서 대졸자 청년실업난이 전공과 일자리가 미스매칭이 원인이라면서 학과를 통폐합하라고 해 학교가 일방적으로 학과를 없애고, 정원을 대폭 줄이는 등의 프라임사업 때문에 학생들이 이에 대한 반대 시위를 연일 하고 있다”며 짜증을 냈다.

이 말을 듣던 부모는 아연실색한다. 이게 뭔 말인가? 조금전 신문에서 읽은 자유학기제 취지는 다 어디로 가고, 취업 안 되는 학과는 통폐합을 지시한 정부는 중학생들 대상으로 자유학기제를 실시하겠다던 그 정부가 아니었던가. 아니 이런 모순이 있을 수 있나? 중학교 때 자유학기제로 흥미와 재능을 찾아 대학에서 역사학 관련 학과를 찾아간 철수는 대학에 와서 사학과는 취업이 안 되는 학과로 몰려 통폐합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흥미와 재능 박살내는 ‘프라임사업’ 맞나요?

모순이다. 어처구니없는 모순이다. 자유학기제는 왜 실시하는가. 의미있는 중학교 생활을 보내기 위해서 자유학기제를 실시하는 게 아니다. 중학교 시기에 자신의 흥미와 재능을 발견해 고등학교와 대학전공·직업선택을 적성에 맞고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진로를 찾아보라는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때 찾은 자신의 진로적성이 대학에 가서는 아무 짝에 필요 없는 상황이 된다면 자유학기제는 왜 하는가. 아니면 이런 모순 덩어리 프라임사업은 왜 하는가를 박근혜 정부에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정부의 가장 큼지막한 캐치프레이즈는 지겹도록 들은 ‘창조경제’이다. 창조의 대전제는 자율이다. 자율적이지 않는 창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박근혜 정부의 초·중등·고등교육 관점이 자율에 방점이 찍혀 있지 않았다면 창조경제 주창은 결국 모순이 되고 만다. 그것도 후유증 쉽게 끝나지 않는 교육적 모순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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