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은 가장 맛있고 가장 싱싱한 회(膾)와 같죠”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일식집 어도. 출입구 옆에 걸린 ‘연중무휴’ 안내 나무간판이 유난히 커 보인다. 취재하러 가기 전 어도(魚島) 배정철 사장(49)에 대해 관련기사를 스크랩 했다. 대충 그의 강고한 나눔의 철학을 알게 된지라 ‘연중무휴’ 네 글자가 영업의 연중무휴가 아니라 ‘나눔의 연중무휴’라는 뜻으로 눈에 들어왔다.

바쁜 점심시간을 피해 가게 문을 열었다. “어서오십시오”라는 일식집 특유의 우렁찬 인사 합창이 들린다. 그 중 가장 크게 인사말을 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 일식집의 사장 배정철씨다. “직원들도 여럿인데 꼭 그렇게 사장께서 가장 크게 소리를 지르실 필요가 있습니까?, 요즘 말로 오버하는 거 아닙니까?”

배 사장은 기자의 “오버 아니냐”는 말에 뭔가 마음에 다가 온 것이 있다는 듯이 답변했다. “제가 요즘 살고 있는 인생이 오버입니다” 무슨 뜻이냐고 묻자, “전라도 시골 촌놈이 무작정 서울 상경해 청와대가서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포장까지 받았으니 이게 오버 아니면 뭐가 오버냐”고 되묻는다.

배정철 사장의 이력을 알면 그가 그렇게 이야기를 할만도 하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어린 시절은 몹시도 가난했다. 시쳇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1962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그는 5살 때 아버지를 여의였다. 곳간이 휑하게 빈집이 장마로 집 기둥마저 뽑힌 격이었다.

시간은 흘렀다. 그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기억도 안난다고 했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배고픔 밖에 없었다고 했다. 어린 나이 16세 때 무작정 서울 상경을 했다. 그래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울 노원구 소재 공민학교에서 책도 읽고, 숫자도 배웠다.

그러던 중 그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다름 아닌 조그만 일식집의 보조(속칭 시다)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무조건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로 들어간 억센 일식집 일은 어렸을 적 너무 먹지 못해 약골이던 배 사장에게는 늘 벅찰 수밖에 없었다.

“일식집에서 먹고 자고 생활을 했었죠. 새벽 4시면 일어나 연탄 150장을 갈았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하루에 두 번씩이나 말입니다. 연탄 가는 일을 너무 많이 하니까 연탄가스에 자주 중독이 되더라구요. 나중에는 폐도 매우 약해지고, 비염도 생기고, 건망증도 심해져 선배들한테 참 많이도 두들겨 맞았습니다. 평생 맞을 매를 그 때 다 맞았던 것 같습니다. 매를 맞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몸 상태가 최악으로 치달으니까 이 불효막심한 놈이 홀어머니 두고 세상을 뜨려는 결심까지 했었습니다.”

당시에 100만원이면 적지 않은 돈이었다. 배 사장은 몸이 좋지 않은 어머니를 위해 그 돈을 마련해드리고 자신은 자살을 하려고 결심했다. 자살을 하더라도 어머니는 봬야 한다는 심정으로 새벽 3시에 일식집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그 새벽에 어머니께서는 몸이 아픈 아들을 빨리 쾌유하게 해달라고 울면서 기도를 올리고 계셨다.

“그 순간, 참 제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더라구요. 당신도 몸이 많이 좋지 않으셨는데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정말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더 열심히 살아서 어머니께 효도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안들더라구요.”

이후 배 사장은 이를 악물고 일을 했다. 죽기로까지 생각했던 놈이 뭐는 못하겠냐는 식이었다. 그러다 세끼 식사도 제 때하고, 일도 많이 늘어 어엿한 일식집 중추일꾼이 돼 있었다. 특히 늘 밝은 얼굴에 인사성이 좋아 배 사장을 한번 본 손님들은 그를 기억하고 다음에는 꼭 그를 찾았다.

그러던 1992년, 배 사장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왔다. 그가 몸담았던 일식집을 인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 때를 배 사장은 남들을 도우면서 살라는 하늘의 엄명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건물주는 집값을 벌어서 달라고 했고, 당시 일식집 주인은 매달 주변 소외된 노인들께 식사대접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나중에 일식집을 운영하면 꼭 실천하리라는 견본을 전 사장이 가르쳐쳤으니 “배정철, 너에게 이런 조건을 다 줄테니 나누면서 살라는 하늘의 뜻이 아니고 뭐겠냐”고 했다.

그 이듬해부터 배 사장은 바쁜 산타클로스가 됐다. 그것도 성탄절만 나타나는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매일매일 나타나는 산타클로스 말이다. 일주일에 두 번씩 300여명의 노인들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하고 서울 강동구 거여동 무지개재활원, 경기도 하남시 실로암 연못의 집 등 5곳에는 매주 쌀 20kg 1포와 생선 1박스를 계속 공수하기 바빴다. 나눔을 돈 버는 식당 일처럼 해댔다.

그러다 2001년 그의 기부는 폭과 깊이가 좀 더 커진다. 배 사장은 그 이유로 서울로 상경하던 때를 빛바랜 사진 꺼내듯 기억의 갈피를 넘겨댄다. 친구 한명과 서울로 상경하면서 둘은 다짐을 했다. “나는 몸이 약하니 내 몸이 건강해지면 몸이 아픈데 돈이 없는 사람을 반드시 돕겠다는 거였고, 친구는 선생님이 돼 고향에 돌아가 아이들을 이해하는 선생님이 되자는 그날 둘의 서울역 기억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 옛 기억은 현실이 됐다. 서울대 의대 김석화 교수의 소개로 서울대병원 차상위 계층 등 불우이웃돕기 후원회인 함춘후원회에 선천성 기형환자 돕기로 3천만원을 기부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3년간 이 후원회에 9억원의 기부금을 전달했다.

그는 순천향대학교 병원에도 2007년부터 매년 2천만원씩 불우환자돕기에 써달라고 기탁을 해오고 있다. 서울역 약속의 고향친구도 자신의 뜻대로 고등학교 교사가 됐다. 그 친구가 재직하는 전남 순천 효천고등학교에도 매년 2천만원 장학금을 정성껏 보낸다.

게다가 매년 경기도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개최하는 불우이웃돕기 바자회에 3천만원 상당의 일식 음식으로 성금을 보태고 있다. “3천만원 상당의 음식을 만들려면 꼬박 며칠을 고생해야 합니다. 사장 잘못 만나서 직원들이 생고생 하고 있죠.”

배 사장은 직원들이 고생을 한다고 말하면서도 직원 중에서 자신처럼 주변사람을 돕는 사람이 분명 나올 것이라는 확신에 찬 말을 할 때는 이 집 어도의 물 좋은 생선회를 씹는 듯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그의 따뜻한 기부 온도를 드디어 나라까지 체감했다. 지난 7월 15일 청와대에서는 국민이 직접 뽑은 '나눔과 봉사의 주인공' 포상식에서 저소득층 환자, 불우이웃 등에게 10억여 원을 기부한 배정철 사장에게 국민포장을 수여했다. 그동안 그의 기부금은 현물까지 합치면 40억원에 달한다.

적지 않은 돈이다. 전남 장성에서 못 먹고 자란 약골청년 배정철이가 “하느님, 내 몸을 낫게 해주시면 저처럼 약하고, 아픈 사람을 반드시 돕겠습니다”라고 한 그의 약속이행을 나라가 확인해 줬다.

“대학병원에 기부금 전달하러 가 본 게 대학과 인연의 전부입니다. 못 배웠지만 못나게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요즘 대학에서 뭘 가르치는지는 무식해서 모르겠습니다만 꼭 가르쳐서 내보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사회는 함께 살아가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대학에서 어려운 공부를 배우고, 익히는 목적은 자신의 출세, 명예, 권력이 최종목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는 세상을 좀 더 편하게, 행복하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교수님들께서 꼭 가르쳐 줘야 합니다.”

어도 배정철 사장의 대학에 대한 당부는 그가 학교에서 선생님에게서 배운 것이 결코 아니다. 자신만 잘되면 그만 이라는 이기주의가 팽배한 이 사회에서 그가 독학한 결론의 명제다. 어도 일식집을 나서는 데 배 사장이 한마디 건넨다. “이 놈 배정철 자랑말고 독자들이 내 기사를 읽고 기부하며 돕고 사는데 조금이라도 느낌이 오게 써 주세요. 그래서 인터뷰에 응한 겁니다.”

“어서 오십시오.” 배정철 사장을 포함한 그들의 인사합창이 또다시 들린다. 수족관에 싱싱한 횟감이 힘이 넘쳐 팔딱거린다. 나누며 사는 사람들의 삶은 이리도 힘이 넘치는 것임을 알려주듯이 어도 수족관은 계속 팔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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