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계 80여 개 나라 1500개 도시에서 마른 가을들녘에 짚불이 번지 듯 반(反)금융자본 시위가 순식간에 번지고 있다. 지난달 17일 미국 맨해튼 뉴욕증권거래소 인근 주코티공원에서 30여명이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the Wall Street)'는 의미심장한 비수의 단어를 던진지 불과 한 달 만의 일이다.

시위가 미국의 주요 도시를 넘어 유럽으로, 남미로, 아시아로, 세계 전역으로 번지는 들불은 마치 탐욕스러운 금융자본을 불살라 벌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불길은 점점 거세지고 있다. 금융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전소(全燒) 위험에 놓인 것이다.

지난 2008년 대금융위기 후 미국인들은 집값 폭락과 실업고통의 늪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계속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탈진 상태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상태다. 당시 미국 정부는 7000억 달러의 공적 자금을 쏟아 부었다.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은 금융기관들의 목숨만을 건졌지만 서민들은 계속적인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 공적자금을 받은 금융기관은 '보너스 잔치'까지 벌였다.

이러한 미국 정부의 과도한 구제금융은 국가를 재정적자의 위기로 몰아 넣었다. 그러나 그 보너스의 댓가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부담으로 다시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결국 '1%만을 위한 금융 자본주의 시스템'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면서 힘들게 작동됐다.

그러나 금융자본주의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기계에 또다시 금융이라는 휘발유를 급유해야 했다. 이 급유 조달과정에서 서민의 고혈과 중산층의 몰락을 담보로 해 기계는 돌았다. 이미 벌써 촘스키는 "사악한 순환구조 속에서 1%밖에 되지 않는 이들에게 엄청난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동안 나머지 99% 사람들은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 무산계급)가 되어 갔다"고 신자유주의 시대의 비극을 경고했었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깃발은 전 세계에 나부꼈다. 깃발을 펄럭이게 한 바람은 ‘태풍 같은 금융화’였고, 그 태풍은 이제 쓰나미가 돼 세계경제를 일시에 위험으로 빠뜨릴 대재앙으로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금융자본은 지난 30년 동안 새로운 금융시스템은 만들어냈지만, 결국 스스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 쉽게 말해 ‘돈놓고 돈먹기식’ 야바우 판이 미국 금융의 심장 월가 뒷골목에서는 성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생상품 거래와 장부외거래, 그림자 금융 등 야바우의 전형적인 눈속임은 금융시스템 자체를 불신과 혼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마치 도박판을 연상케 했다. 특히 부시 정권의 생뚱맞은 부자감세 정책은 가뜩이나 불안정한 미국 경제를 혼란의 늪으로 끌고 들어갔다.

경제 활성화의 미명 아래 부자감세는 계속 이어지면서 국가의 재정적자는 산이 되고 말았다. 부자감세로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경제도 회복시키지 못한 채, 빈부의 양극화라는 불길에 휘발유를 붓고 홀랑 탄 집에서는 중산층들은 길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번 미국의 월가 시위는 이러한 금융자본의 타락한 도덕성, 미국 정부의 엇박자 경제 정책에 대한 서민들의 분노가 진앙지이다. 그것은 무차별한 무한경쟁과 천박한 자본의 비호, 공동 선(善)을 외면 한 신자유주의 비만한 몸 덩어리, 오만한 정신 상태는 결국 한밤에 응급구조를 요청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반금융자본 시위에 대한 마이클 샌델 교수의 견해는 간단하다.

"월가 점령시위는 금융위기와 그에 미국정부가 대처하는 방식에 대한 사람들의 지속적 좌절과 분노가 표출된 것"으로 "근본적으로 정의와 공정성에 관련된 문제다." 이득은 사유화되고 손실은 공유화되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바로 월가 시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은행과 투자회사들이 호황기에는 얻은 이윤을 통째로 가져가면서 위기가 발생할 때는 구제 금융으로 생존하고 그 피해는 납세자인 국민들에게 전가되는 이상야릇한 룰이 바로 지금 세계 자본주의 심장, 미국의 월가를 점령하라는 분노한 시민들의 명령이다.

금융자본의 무한욕망과 신자유주의의 실책에 책임을 묻는 월가 시위는 우리 시대의 정의에 대해 새로운 성찰을 요구한다. 기득권 '1%'들이 시위대를 폭도라니 계급투쟁을 한다느니 몰아세우지만, 월가의 반금융자본 시위는 이성적이고도 합리적인 분노다.

이는 비단 미국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다.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절박한 숙제와 정확히 겹친다. 이명박 정부가 부자감세와 기업프렌들리를 내세웠지만 경제 활성화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고 이와 쌍둥이처럼 행동한 교육부의 엘리트 위주 교육정책은 대학의 양극화, 대학 지역별 편차 심화를 야기하고 이에 터지는 청년실업 문제는 한국의 월가인 “여의도를 점령하자”고 할지 모를 지경에 와 있다.

대학은 사회를 지탱하는 지성과 양심이 자라는 곳이다. 특히 대학 교수는 사회 현상을 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예지자이다. 대학교수를 우상화하자는 논리가 아니다. 교수는 학문과 가장 밀접해 있다. 학문은 교과서이다. 교과서는 원칙이다. 그래서 그 원칙을 늘 다루는 대학 교수는 파행이 넘쳐나는 시기에 원칙을 내세우게 된다. 그것은 예지력과 일맥상통한다.

지금, 진정한 대학 교수라면 가속도를 내는 신자유주의에 서행의 노란 깃발을 꺼내 보여야 한다.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논리가 엘리트라는 이름으로 둔갑하는 것을 정확히 찍어내야 한다. 강자 99%가 1% 약자를 위해 자신의 몫을 희생할 수 있는 곳이 대학이다. 또한 1% 강자가 99%의 약자를 위해 100%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곳도 대학이다.

대학은 보루다. 이념과 체제의 보루가 아니라 공동 선(善), 휴머니즘의 보루다. 그 역할이 너무나도 절실하다. 절실할 때 역할을 하지 않으면 주객이 전도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손님이 주인되고, 주인이 손님되는 사건을 그냥 웃어 보낼 일은 아닐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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