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에티오피아 국립 아다마대학교 총장으로 이장규 전 서울대 전기공학과 교수가 부임했다. 살다보니 한국인이 아프리카에서 대학 총장이 되는 일이 생겼다. 아다마대학교는 학생이 2만여 명, 교수 1000여 명인 에티오피아에서 두 번째로 큰 국립대이다. 그럼에도 이 총장은 그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유는 “자신에게 총장수행 능력이 있는가” 였다. 그가 그런 고민을 심각하게 한 이유는 국가를 살릴 과학기술 인재양성을 제대로 해 줄 총장을 찾아 세계 구석구석 다닌 그들의 열정이 쉽게 결정하지 못하게 만들더라고 고백했다. 결국 세계 최고의 항법제어전문가 이장규 교수를 움직인 것은 총장이라는 자리가 아니라 국립 아마대의 교수들의 열정이었다. 후학을 양성하는 같은 교수로서 오히려 큰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는 부산대 총장의 후보자격을 놓고 말이 많다. “된다, 안된다” 하면서 말이다. 무릇 대학은 바깥 사회와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국립대이니 공무원법 적용을 받지만 법적여부로 자격의 시시비비를 따지는 게 대학이라는 모양상 일단 좋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위장전입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잘 봐 주십시오. 그러면 국민의 충실한 공복이 되겠습니다”라고 국회의원에게 읍소하며 꼭 통과 시켜달라고 난리를 친다. 장관보다 총장이 이 사회에서는 더 존경받는다. 바로 그 이유다. 법으로만 따질 일이 아니다.

특히 국립대의 교수는 더 엄격하다. 지역의 핵심이다. 양심의 원천이며, 교양의 코드다. 심하게는 잘 살아 온 사람의 표본이다. 그 표본들이 지금 부산에서 시끄럽다. 교수에게 총장이라는 보직은 단지 행정 다경험자가 주어진 시간에 학교를 위해, 사회를 위해, 국가를 위해 고민하는 시간이다. 교수 상위 개념이 총장이 아니다. 대학사회에서 만큼은 더욱 그렇다.

이 시기에 마침 교과부에서는 국립대 총장 직선제를 바꾸겠다는 안을 내놓는다. 한 대학의 총장의 직선제 호불호 선택은 대학의 책임이며, 판단이다. 국립대이니 국가 행정부서에서 좌지우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한 우리나라의 국립대 수준은 계속 그 모양 그꼴이 되기 십상이다.

대학의 총장의 선출은 교수 파벌 간에 싸울 일이 결코 아니지만 그것이 관행이 돼 온지 오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에티오피아 아다마 대학교의 교수와 같은 열정이 언젠가부터 식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모든 교수를 매도하고 싶지 않다. 분명한 건 제자들, 학생들 창피한지 모르고 자신의 편이 총장 보직에 오를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감내하겠다면 언젠가 우리는 에티오피아에 가서 총장을 모셔 와야 할 날이 그리 멀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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