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값 등록금 투쟁보다 학벌주의 타파 운동이 먼저다

"학벌주의도 범죄다" 죄의식 없이 사는 우리들의 무감각 박병수l승인2012.04.29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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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학벌이 신분을 결정하는 사회다. 학벌로 뭉친 특정 집단이 돈과 권력을 독점한다. 게다가 학벌을 통해 얻은 부와 권력, 명예는 다음 세대에게 고스란히 세습된다. 학벌은 사회 계층의 수직이동을 막는 장벽이며 평생 써먹어도 닳지 않는 상징 재화다. 학벌 없는 사람은 결혼하기도 힘들다. 대통령에까지 올랐지만, 상고 출신인 노무현도 끝내 이 학벌의 벽을 넘어서진 못했다.

반값 등록금 촛불집회에 나온 대학생들.

대학 등록금이 첨예한 정치적 이슈로 떠올랐다. 대학 등록금이 지나치게 비싸다고 아우성이다. 이로 인해 가계 부담이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고, 많은 대학생이 등록금 마련에 허덕이며 학업은 뒷전이고 아르바이트에 내몰리는 것도 사실이다. 한 대학생이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질식사했다는 안타까운 보도도 있었다. 더러는 금융기관에서 학자금을 빌려 쓰고 이를 나중에 갚는데, 그러다보니 졸업을 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는 순간에 이미 채무자 신분이 된다. ‘비싼’ 등록금의 핵심적 진실은 대학에서 공급하는 교육 서비스의 질이 등록금에 견줘 못 미친다는 얘기다. 대학 문을 나서자마자 ‘대졸 실업’과 ‘88만원 세대’로 내몰리고, 결국은 인간적 존엄을 잃은 채 ‘쓰레기가 되는 삶’으로 추락한다.

대학 졸업장을 얻는 데 들인 비용보다 취업 같은 현실적 효용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에 등록금이 비싸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가격에 견줘 상품의 질이나 가치가 떨어지면 소비자가 구매를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대학 졸업장은 학력·학연·학벌이 생산되는 기반이고, 학벌사회에 편입하는 데 필요한 최소 조건이다. 학벌사회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결국 사회의 하층 계급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대학 졸업장이 학벌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상징자본이라는 점, 그리고 학벌에 따른 구별짓기와 계급적 차별이 남아 있는 이상 대학 졸업장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의 기제인 학벌사회가 엄연한데 학벌에 대한 환상이나 대학 졸업장에 대한 수요가 없어질 리는 없다. 대중 매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회 전체가 과잉 학력을 부추긴다. 과잉 학력은 개인으로 보나 국가로 보나 낭비인데도 말이다.

‘반값 등록금’ 문제는 무엇인가? 등록금이 비싸져서 가계 부담이 커졌다는 건 문제의 표피에 지나지 않는다. 그 핵심적 본질은 다른 데 있다. 비싸니까 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게 소비자의 입장이고, 등록금은 제대로 받아야 한다는 게 공급자의 입장이다. 둘의 입장은 상충한다. 반값 등록금을 실현하려면 정부가 국립대학을 포함해서 사립대학의 손실 부분까지 보상해줘야 하는데, 그러자면 세금을 써야만 한다. 고등교육이 사회적 공공재가 아닐뿐더러 신분 징표로서의 대학 졸업장 취득에 따른 모든 이익 역시 개인에게 귀속된다. 세금이 공공성과 무관한 대학생의 사익과 사학 재단의 영리를 위해 퍼부어져야 한다는 것은 수익자 부담 원칙에도 벗어난다. 그 세금은 대졸자뿐만 아니라 고졸이나 중졸이 최종 학력인 납세자에게서도 나올 것이다.

반값 등록금은 정당한가

열등한 학력 때문에 차별과 구별짓기를 당하는 계층이 ‘반값 등록금’을 부담한다는 게 이치에 닿는 일인가? 가난한 자가 제 티끌 같은 재산을 모아 부자를 돕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위로하며 돕는 격이다. 단지 납세자라는 이유로 자신과 아무 연관이 없는 반값 등록금을 위해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이런 해법에 흔쾌하게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학교육의 인프라와 교육서비스의 질적인 향상에 연동하지 않고, 다만 대학 등록금만 반값으로 내리겠다는 정치권의 약속은 유권자의 표를 의식한 전형적인 대중 영합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반값 등록금 투쟁은 공공성이 부재할 뿐만 아니라 병든 몸통은 그대로 두고 꼬리만 바꾸자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학벌주의야말로 병든 몸통이다. 그러므로 반값 등록금 투쟁보다 앞서야 할 것이 학벌주의 타파 운동이다.

그렇다면 ‘학벌’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왜 사회적 문제가 되는가? 어느 특정한 계층에 권력과 돈이 집중하는 현상에서 ‘학벌주의’의 폐단이 파생한다. 학벌은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차이’를 낳는다. 아울러 이 차이는 “생활조건의 주요한 집합을 갈라놓는다.”(부르디외, ‘구별짓기’) 계층의 서열화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 중심에 ‘서울대학교’가 있다. 김상봉은 “서울대는 한국의 지배계급이다”(김상봉, ‘학벌사회’)라고 규정한다. 학벌사회의 시발점은 국립대학교의 특권적 지위를 갖고 있는 ‘서울대학교’다. 학벌사회가 일으키는 모든 폐단도 그 책임이 패권적 지위를 갖고 온갖 특혜를 누리는 ‘서울대학교’로 귀속된다. 한국사회의 권력과 재화의 분배에서 ‘서울대학교’ 출신들은 최상위 수혜집단이다. 우리 사회에서 어느 학교 출신이냐에 따른 연고성은 횡적·종적 유대관계를 만드는 기초적 인자다. 김상봉은 학벌주의가 만드는 문제를 이렇게 명료하게 짚는다.

한국사회에서 학벌은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의 기제이다. 여기서 사회적 불평등의 기제란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차별로 고착시키는 구분원리, 즉 차별과 불평등의 규정근거(Bestimmungsgrund)를 뜻한다.”(김상봉, 앞의 책)

학벌이 계급적 차이를 만든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학벌의 서열화 정점에 서울대가 있고, 그 아래에 연세대·고려대가 있다. 정진상은 이 대학 서열체제에 두 차원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서울대를 정점으로 형성되어 있는 ‘대학간판’ 서열이고, 다른 하나는 전문적 일자리가 보장되는 학문, 예컨대 자연 계열의 의대, 한의대, 약대 등과 인문사회 계열의 법대, 경영대, 사범대를 상위에 두는 학문 서열이다.”(정진상, ‘국립대 통합네트워크―입시 지옥과 학벌 사회를 넘어’)

학벌사회를 떠받치는 것은 강고한 대학 서열체제다. 서울대는 대학 서열의 피라미드에서 최상위를 차지한다. 서울대 출신들이 정치, 경제, 언론, 학문 등의 분야에서 독점적 지배 권력을 누리는 까닭이다. 서울대 학벌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사회적 신분의 징표다. 어느 분야에 있든 학벌주의라는 연줄을 타고 기득권을 쉽게 손에 거머쥔다. 시인 박노해는 이렇게 시에 적는다.

“서울대 연·고대 출신끼리는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인맥을 타고 / ‘우리가 남이가’ 끌어주고 키워준다면서요.”(박노해, ‘사람만이 희망이다’)

학벌의 연고에 따라 끌어주고 밀어주기는 어느 조직에나 있는 관행이다. 학벌에 따라 공공연하게 ‘숨은 구별짓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아래 연세대나 고려대와 같은 차상위 집단의 졸업자 역시 권력과 재산을 취득하는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선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학벌에 따라 권력·돈·명예가 따라오고,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 구조가 고착화된다.

노무현은 왜 실패했는가? 그의 취약점은 ‘학벌’의 빈곤함, 더 넓게는 아비투스(habitus)의 부재에 있었다. 아비투스를 사회구조와 개인의 실천 행위 사이의 인식론적 단절을 넘어서는 매개적 메커니즘으로 이해하고 개념화한 학자가 피에르 부르디외다.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서 행동과 인지, 감지와 판단의 성향체계로서 개인의 역사 속에서 내면화되고 육화된 메커니즘을 ‘아비투스’라고 설명한다.

“학벌을 통한 지배 헤게모니는 대중매체를 통해 전파되어 계층별로 일종의 ‘아비투스’를 성립한다.”(김동훈, ‘한국의 학벌, 또 하나의 카스트인가’)

노무현은 명문으로 꼽히는 부산상고 출신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대학 졸업장이 없었다. 사법고시를 거쳐 변호사로, 인권운동가로, 국회의원으로, 장관과 대통령으로 입신양명하지만, 그에게 따라붙는 ‘상고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떼지 못했다. ‘고졸’ 출신은 아무리 발버둥치고 애를 써도 우리 사회의 지배계급을 형성하는 서울대나 연·고대 출신들이 갖는 학력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 한계에 놓인다. 노무현에겐 학벌에 따른 ‘인맥’도 ‘아비투스’도 없었고, 그에 따라 권력의 핵심에 있으면서도 권력에서 배제되는 기이한 현상과 마주쳤던 것이다.

노무현의 교양 없음

내 주변에서 노무현을 대놓고 비난하던 사람들은 흔히 그 비난의 근거로 노무현의 ‘교양 없음’을 들었다. 이때 ‘교양’이라는 것은 지식도 아니고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이해력도 아니다. 우리 사회의 지배 권력 집단을 이루는 사람들의 인식이나 화법과 노무현의 그것이 크게 다르다는 뜻이다. 노무현은 확실히 달랐다. 그의 화법은 일체의 가식이나 ‘잘난 척함’ 없이 솔직하고 대담했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은 자들의 징표인 ‘교양’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 다름을 싫어했다. 그는 학벌사회의 부조리함, 즉 ‘구별짓기’에 의해 ‘왕따’를 당하고 내쳐진 것이다. 고졸자가 대졸자에 비해 차별을 받고, 같은 대졸자도 지방대나 비명문대 출신이 명문대 출신에 비해 차별을 받는다면, 이런 사회는 ‘학벌사회’다. 김동훈은 ‘학벌이라는 집단적 편견’이 사회의 전 부분에 스며들어 ‘문화적·심리적 갈등’을 빚어내 ‘갈등사회’를 낳는다고 말한다. 학벌사회의 본질은 변형된 신분사회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학벌사회라고 명명할 때, 사회학적 측면에서 그것은 변형된 신분제적 가치와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를 말한다. 정치학적인 측면에서는 사회적 권력의 배분이 학벌이라는 네트워크에 의해 이루어지는 파당적 요소로 분배되는 붕당(朋黨)적 사회를 뜻한다. 경제학적인 측면에서는 한 사회가 생산해내는 부와 권력을 소수 학벌집단이 지대추구(rent-seeking) 행위를 통해 독점적으로 차지하는 독과점사회를 말하며, 문화적 측면에서는 학벌이라는 집단적 편견이 개인의 인간관계 형성이나 결혼, 취업 등 일상의 모든 영역에 파고들어 문화적·심리적 갈등을 빚어내는 갈등사회를 의미한다.”(김동훈, 앞의 책)

김동훈은 우리 사회가 학벌이 신분을 결정하는 사회라고 판단한다. 그 특정 집단에 돈과 권력이 집중하면서 독과점사회가 만들어진다. 서울대 망국론이 나오는 까닭이다. 끼리끼리 뭉쳐서 갖가지 좋은 것들을 독점하는 학벌사회가 낳은 폐단들이 일상의 영역으로 스미고 파고들면서 인간관계, 결혼이나 취업 등에 불공정한 경쟁을 일삼으며 계층 간의 문화적·심리적 갈등을 파생시킨다는 것이다.

서울대 망국론

노무현이 대통령 자리에 있을 때 유독 많은 갈등이 빚어진 것처럼 보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 갈등의 근원지는 노무현이 아니라 그의 대통령직 수행에 번번이 발목을 잡은 정치 권력과 언론 권력이다. 그 뒤에는 학벌이라는 뒷배를 믿고 그 ‘프리미엄’의 단맛을 누리는 기득권 계층, 지식인 엘리트, 정치가들이 있다. 부와 권력을 쥔 그들이 학벌을 섬기는 것은 그것이 자신들에게만 유리하도록 되어 있는 불공정 게임의 특혜를 누리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학벌’은 부르디외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상징 자본’이다. 평생 써먹어도 닳지 않는 상징 재화다. 학벌이 공공연하게 상징 재화로 통용되는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부른다.

“학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소수의 학벌취득자들이 사회적 권력과 재화, 명예를 독점하게 됨으로써 필연적으로 사회적 갈등이 증폭된다. 또한 구성원들의 능력계발과 참여가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사회 발전의 총체적 에너지가 저하되고 무기력과 불만이 쌓이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학벌이라는 증서 취득에 사회적 에너지가 집중됨으로써 소모적인 경쟁이 끊이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된다.”(김동훈, 앞의 책)

결국 학벌이 편견과 차별의 근거로 작동하고, 당파적 이익을 담보하고 부의 독과점을 지속시키는 기제가 되는 한 학벌주의에서 파생된 소모적 악순환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왜 ‘학벌사회’가 문제가 되는가? 한마디로 학벌이 그것을 얻는 데 들인 비용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학벌에 따르는 특혜는 사회적 공정성의 원리를 현저하게 위반한다. 학벌이 공공적 원칙과 경쟁원리에 우선한다는 점이 문제다. 학벌을 통해 얻은 부와 권력, 명예는 다음 세대에게 고스란히 세습된다. 학벌은 사회 계층의 수직이동을 막는 장벽이다. 아울러 학벌은 중요한 결혼 조건 중의 하나다. 좋은 학벌은 배우자 선택의 폭을 넓힌다. 반면에 학벌 없는 사람은 배우자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결혼 자체가 힘들다. 김상봉은 학벌사회가 낳은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한다.

“다른 많은 사회문제에서도 그렇지만 여기서도 역시 문제의 최초의 뿌리는 권력독점과 그에 따르는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불의에서 시작되고, 이로부터 사회적 의사소통과 의사결정의 왜곡이라는 불합리로 이어지며, 이 불합리로부터 비효율과 경쟁력의 저하라는 결과를 낳게 한다.”(김상봉, ‘학벌사회’)

학벌주의가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우리 사회에 작동하는 차별과 불평등의 근본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김동훈은 보통사람들이 학벌의 벽을 실감하는 것은 일상에서 겪는 문화적 편견과 차별이라고 말한다. 학벌주의는 개별자의 집단무의식까지 파고들어 지배한다.

“개인이 사회적 존재가 되는 계기에 반드시 학벌이 끼어들며 학벌이 끼어든 그 순간에 개인은 사라지고 개인의 정체성은 학벌이라는 집단적 이미지에 매몰되어버린다.”(김동훈, 앞의 책)

학벌주의의 핵심은 패거리 짓기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분야에서 패거리를 지어서 좋은 자리를 독점하고 잇속을 챙기는 게 학벌주의다. 학벌은 개인과 개인 사이, 계층과 계층 사이에 깊은 골을 낸다. 그 골을 타고 사회 갈등과 하위 계층의 누적된 불만이 흘러간다. 우리 사회 누구도 학벌주의라는 족쇄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은 학벌주의 사회에 살면서 그 관행에 자신도 모르게 젖어 있기 때문이다. 학벌주의의 폐단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조장하거나 방임하는 태도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학벌주의도 범죄다

김동훈은 우리 사회가 학벌주의라는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천적 방안으로 첫째, 학벌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관행을 정착시킬 것. 둘째, 학벌주의를 조장하는 언론과의 싸움을 할 것. 셋째, 학벌을 차별하는 기업들을 고발할 것. 넷째, 명문대의 학벌조장 행위를 고발할 것. 다섯째, 고등학교의 반교육적 입시 제도를 고발할 것. 여섯째, 학벌주의의 피해자인 고등학교 학생들의 목소리를 끌어낼 것. 일곱째, 사교육 시장의 학벌 관념 조장행위에 제동을 걸 것 등을 제안한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들의 뿌리를 파고들어가면 이 학벌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학벌 서열이 사회적 신분 서열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고, 학벌을 섬기고 우대하는 사회적 인식을 바꿔야 한다.

학벌주의로 인해 얻은 기득권은 뇌물이다. 뇌물이 범죄라면 학벌주의도 범죄다.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이 범죄인 것과 마찬가지로 학벌차별이 범죄라는 사회적 합의가 나와야 한다. 그런 사회적 합의라는 토대 위에서 학벌차별을 금지하는 제도를 만들고, 학벌차별을 없애기 위한 의식개혁운동이 있어야 한다. 학벌차별로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사회에 알리고 자신들의 분노와 불만을 적극적으로 보여야 한다. 학벌차별이 없는 사회가 좋은 세상이다. 반값 등록금 투쟁보다 학벌주의 타파 운동이 우선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본 칼럼은 본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장석주| 시인

● 1955년 충남 논산 출생

●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입선

●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 출강

● 저서: ‘느림과 비움의 미학’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몽해항로’ 등


박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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