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미국에서 출간된 자료중 ‘OECD 국가 중 교육 분야에서 가장 불평등한 국가’로 영국과 미국이 사이좋게 1, 2위를 차지한 내용이 있었다. 이 자료의 핵심은 하나 더 있었다. 교육 불평등을 가늠하는 데 부모의 재력과 능력이 자식의 교육적 성공에 어느 정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부모의 재력이 곧 아이의 성공이 되는 것이 교육 불평등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료의 작성자가 그 지표를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은 교육이 가난하지만 능력 있는 아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공정성의 장이 아니라 개인이 속한 계급과 신분에 의해 좌우되는 계급적 재생산의 장이 되고 있다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는 점이다. 매우 뛰어난 사회적인 시각은 매우 교육적인 지표로 연결된다는 논리를 그대로 증명해 보였다.

그 대열에 우리나라는 일찌감치 합류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난한 집 아이가 사회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크게 줄어들고 있다. 성공의 정의는 다양하다. 그 다양한 정의 속에는 한 개인이 오로지 개인적 능력과 성실한 노력을 통해 사회적으로 계층이나 지위의 상승을 이룰 수 있느냐의 여부가 포함돼 있다.

이렇게 정의할 경우, 혹, 성공이 사회구조와는 관계없이 개인적인 신화로만 비춰질 가능성과 위험성은 내포돼 있는 게 사실이다. 가령 마이클 조던 같은 스포츠 스타의 화려한 성공 이면에 무수히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미국사회에서 경험해온 좌절과 절망을 엿보기보다는 조던의 특출한 능력과 노력만이 부각되는 우(遇)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 사회에는 개인이 성공할 수 있는 나름 뚜렷한 세 가지 제도가 존재했었다. 그 첫 번째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호시탐탐 정치군인의 길을 노리는 것이고, 둘째는 고시를 패스해 판검사가 되는 것이었다. 군부정치 시대가 막을 내려 정치군인의 설 자리가 사라지고, 사법고시 또한 1학기에 1천만원에 육박하는 수업료를 지불해야 하는 전문대학원으로 바뀐 현재, 앞의 두 방법은 종언을 고했다. 마지막 세번째 방법은 앞의 두 방법보다 화려한 변신을 약속하지는 않지만 어엿한 이 사회의주축으로 살아가게 만들었던 대학교 출신자라는 이름표였다.

이렇게 뚜렷한 길이 있었으니 과거가 현재보다 좋았다는 시대였다고 오도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권력을 틀어쥐기 위해 사회질서를 폭력적으로 뒤집거나, 수직적 신분상승의 꿈으로 청춘의 시간을 마냥 보내야 하는 방식 역시 비정상이고 소수에게만 허용된 예외적인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대학교육은 다수에게 성공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이고 확실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현재 교육의 공공성, 특히 대학교육의 미래가 크게 위협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대학에는 공공성의 논리보다 경쟁과 우수성에만 목을 매는 시장의 논리가 지배적이다. 이 논리는 대학을 기업처럼 운영하거나 기업문화와 타협할 것을 종용해왔다.

그 결과 대학은 지식공장이 됐고, 교육자는 지식노동자가 됐며, 학생은 지식소비자가 된지 이미 오래다. 사립대학이나 국립대학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경쟁의 논리라는 미명하에 사립대학이 소유자의 사적 재산처럼 취급되거나, 국립대학 또한 기업처럼 운영되는 법인으로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교과부는 대학의 공공성을 지키기보다 공공성을 위협하는 사적 이익의 추동자의 역할을 해왔다. 치열한 서열경쟁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묘책이라도 된다고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듯․․․

대학의 기업으로서의 변화는 대학의 근본이념뿐만 아니라 사회적 공공성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 공적 제도로서의 대학은 건전한 교양과 자유로운 지적 탐구, 평등과 공공성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비판정신을 육성해 건전한 시민을 양성하는 데 기여해왔다. 진부한 듯 들리지만 이 속에 많은 것이 들어있다.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를 지키고 사회적 정의와 평등을 앞장서 주장할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이런 공공성의 수혜를 입은 사람들일 것이다.

대학이 공공성을 포기하고 기업처럼 이윤을 좇는다면,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될 곳은 바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자체일지 모른다. 대학 등록금 등 모든 문제는 대학의 공공성과 연결되어 사고해야만 나름 풀린다. 1000만 원이 넘는 수업료를 지불하고 대학 졸업 뒤 의사가 되고 법관이 된다면 그들이 사회정의와 공공성에 깊은 관심을 얼마나 기울일지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다.

대학교육의 공공성을 다시 논의하자는 것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멘탈을 공익성에 두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수성의 논리와 공공성의 가치는 서로 배치되는 논리가 아니다.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길이 교육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길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지금 한국의 대학의 관계자들이 30년, 50년 앞의 이 나라 장래를 담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너무 비약한 표현일까. 대학과 국가의 장래의 함수관계는 사회적 공공재라는 데 있기 때문이다.

<박병수 U's Line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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