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한 홈플러스 회장

평범한 대학생들을 위해 2년째 멘토를 자처하는 대기업 ‘회장님’이 있다. 대형마트 업계 2위 홈플러스의 이승한(66) 회장이다. 이승한 회장은 2010년 5월부터 아내 엄정희(62) 서울사이버대 교수와 함께 한국장학재단(이사장 이경숙)이 진행하는 한국 인재 멘토링 네트워크에 참여해 일면식도 없던 대학생들과 우정(友情)을 쌓아가고 있다.

분초 단위로 짜여진 빡빡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부는 한 달에 한 번 반드시 시간을 냈다. 멘티들을 자택으로 초대했고 한적한 섬으로 함께 1박2일 여행도 수차례 다녀왔다. 권위적인 우리나라 기업문화에서 대기업 최고경영자의 이례적인 행보였다. 이들 부부는 최근 대학생들과의 경험을 한데 모아 ‘청춘을 디자인하다’란 책도 펴냈다.

지난 2월 22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홈플러스 본사 17층 회장실에서 이승한 회장과 만났다. 이날

이승한 홈플러스 회장(왼쪽 세 번째)과 부인

엄정희 서울사이버대 교수(다섯 번째) 부부,

그리고 이들 부부의 대학생 멘티 이재명·이슬

기·박선하·박선영·우영찬씨(왼쪽부터). 인터뷰에는 이 회장의 부인 엄정희 교수와 이들

부부의 멘티인 대학생 박선영(20)·박선하(23)·이슬기(24)·우영찬(25)·이재명(25)씨가 함께 나왔다. 2시간 남짓 인터뷰하는 동안 멘토와 멘티들은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등 허물없는 모습을 보였다.


“멘토 돼달라” 경쟁률 10 대 1

이 회장 부부가 멘토를 자처한 것은 이경숙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을 통해서다. “이경숙 이사장과 삼성물산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어요. 하루는 이 이사장과 식사를 하는데 ‘대학생 멘토링 프로그램을 만들어볼까 하는데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요. 그렇게 흔쾌히 받아들여서 지난 2010년 5월 시작한 것이 2년이 다 돼갑니다. 1기 6명, 2기 8명이지요.” 한국장학재단이 발송하는 이메일과 학교 게시판을 통해 이승한 회장의 멘토링 참가 소식을 접한 대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지원 신청을 보냈다.

이 회장은 샐러리맨의 성공 신화로 대학생들 사이에 유명하다. 경북 칠곡 출신으로 영남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1970년 삼성그룹(공채 11기)에 들어갔다. 이후 삼성그룹 컨트롤 타워인 비서실(미래전략실의 전신)을 거쳐 1999년 삼성테스코 홈플러스의 초대 대표를 지내고 지난해 3월에는 홈플러스 대표이사 회장이 됐다. 홈플러스의 모 회사인 영국 테스코는 지난해 ‘삼성’이란 상호를 떼어내고 삼성물산 지분을 완전히 털어낸 다음에도 이 회장에게 홈플러스의 경영을 맡겼다. 특히 이 회장은 삼성그룹 시절부터 리움미술관, 로댕갤러리, 종로타워를 기획하는 등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탁월한 기획력을 드러냈다.

당초 이 회장에게는 6명의 멘티가 배정됐는데 60명의 학생이 몰렸다. 경쟁률 10 대 1로, 지원자가 미달된 일부 멘토들을 무색케 했다. 박선영씨(서울대 생물교육학 3년)는 “인기가 단연 돋보였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이 같은 인기에 2기에는 당초 계획보다 2명 더 늘려 8명의 대학생을 자신의 멘티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좀처럼 시간 내기가 빠듯했다. 영국 본사와 이뤄지는 각종 회의와 식사 자리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결국 “멘티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다”고 결심한 이 회장이 구원 요청을 보낸 사람이 아내 엄정희 교수다. 서울사이버대 가족상담학과 교수로 상담학 박사 자격을 갖춘 엄 교수는 사실 이 회장보다 이 일에 적격이었다. 이 회장은 “등잔 밑이 어두웠던 셈”이라고 말했다.


타워팰리스 자택으로 초대

역할을 분담한 이들 부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멘티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것이다. 대기업 회장이 자신의 집으로 직접 초대하자 멘티들은 처음에는 어쩔 줄을 몰랐다고 했다. 한국에서 가장 비싸다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를 방문하게 된 멘티 8명은 타워팰리스 인근에 빵맛으로 유명한 김영모 베이커리에서 케이크를 사들고 이 회장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첫 번째 방문 직후 이승한·엄정희 부부와 대학생 8명 사이에는 언제든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핫라인’이 개설됐다. 각자 전화번호를 교환한 이들은 우리나라 유통업계의 대부와 수시로 전화와 문자,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는 특별한 사이가 됐다. 이렇게 전화와 문자, 이메일을 주고 받은 것이 횟수로 7개월째이다.

이후 멘토와 멘티 간의 만남은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이어졌다. 한번 모이면 족히 5시간 넘게 대화가 오갔다. 가령 오후 5시에 만나면 대화는 밤 10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대기업 회장과 한 달에 한 번, 5시간 연속으로 만나는 특권이 평범한 대학생들에게 주어진 것.

대학생 멘티들과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며 이들 부부는 사이좋게 역할을 분담했다. 이승한 회장은 아버지, 엄정희 교수는 어머니가 됐다. 이 회장이 리더십과 조직생활 같은 화두로 멘티들을 부성적으로 이끌었다면, 엄정희 교수는 가족과 친구, 연애와 결혼 같은 것들을 화두로 삼아 멘티들과 얘기를 주고받으며 모성적으로 보듬어 안았다.

특히 엄 교수는 멘티들에게 마치 자식을 키우는 듯한 정성을 쏟았다. 인디언식 이름 짓기, 미래 이력서 작성, 내 삶을 주제로 100자 쓰기, 홀랜드 직업탐색 검사, 다섯손가락 진로상담, 리더십 성향체크, 인생 스티어링휠 만들기 등의 프로그램도 병행했다. 이 회장이 “아내가 원래 참새형 인간이었는데 멘티들을 봐주면서 부엉이형 인간이 됐다”고 할 정도였다.

엄 교수가 멘티들에게 애착을 쏟은 것은 죽은 아들 성주군 때문이기도 했다. 엄 교수는 불임클리닉에 다니며 힘들게 얻은 외아들 성주군을 초등학교 1학년때 우연한 사고로 가슴속에 묻어야만 했다. 당시 스트레스로 위암도 앓았다. 엄 교수는 “죽은 아들 때문에 멘티들을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대한 것 같다”고 말했다.

1975년 결혼식을 올린 이승한·엄정희 부부는 이 회장의 삼성그룹 비서실 선배인 손병두(현 KBS 이사장)의 소개로 만났다. 국세청장과 삼미그룹 부회장을 지낸 엄 교수의 친정에서는 예비사위를 못마땅히 여겼다고 한다. 이 회장은 아들만 일곱인 시골 정미소집의 막내였다. 하지만 이 회장은 장모를 끝내 설득해 1975년 엄 교수와 식을 올렸다. 이승한·엄정희 부부는 결혼 37년째인 지금도 도곡동 타워팰리스에서 소문난 잉꼬부부로 지내고 있다.


인천 무의도로 1박2일 여행

지난해 8월과 올 2월에 이들 멘토와 멘티는 인천 무의도로 1박2일 동안 워크숍을 떠났다. 무의도에는 홈플러스가 지난해 7월 개관한 홈플러스 아카데미가 있다. 인재사관학교로 유명한 미국 제네럴일렉트릭(GE)의 크론토빌연수원을 벤치마킹해 만든 곳이다. 멘토와 멘티들은 무의도에서 1박2일간 머물면서 낙조를 배경으로 와인을 나누면서 수많은 얘기를 했다. 당초 밤 10시까지 예정됐던 일정은 밤 12시가 넘도록 이어졌다.

이 회장이 이들을 무의도로 이끈 것은 사색의 장(場)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요즘 대학생들은 검색은 잘하지만 사색이 부족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 회장은 “우리 때는 무엇을 찾으려면 도서관에서 책을 뒤지거나 직접 발로 뛰어야 했지만 요즘은 검색만 하면 너무 쉽게 나온다”고 했다. 편리해서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이 돋보였다.

대학생 멘티들은 무의도에서 평소 갖고 있던 고민을 스스럼없이 털어놨다. 이들이 고민하는 문제는 취업과 결혼 같은 문제보다 의외로 정체성과 인간관계에 관한 문제가 많았다. 멘티들은 “나 자신을 스스로 소개해 보라”는 말에 한참을 머뭇거렸다. 학교 내 외톨이를 뜻하는 ‘아싸(아웃사이더를 일컫는 말)’ 같은 단어가 이들의 주제로 떠올랐다.

물론 학생들에게 멘토링을 하면서 이들의 부족한 부분도 수없이 발견했다. 특히 전체 직원만 2만5000여명에 달하는 거대조직을 이끌어가는 이 회장에게는 그런 점들이 눈에 띄었다. 미래에 대한 뚜렷한 목표나 방향 설정이 안 돼 있는 학생도 있었다. 자신의 ‘자의식(Ego)’은 강한 데 반해 ‘팔로십’이 부족해 보이는 학생도 눈에 들어왔다.

이 회장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들과의 대화를 풀어 나갔다. 어릴 적 ‘걸리버 여행기’의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얘기, 삼성에 입사해 가장 해외 출장을 많이 다닌 직원이 되면서 어릴 적 꿈에 다가섰던 얘기를 했다. 말단 신입사원부터 대기업 회장까지 두루 거친 이 회장이 리더와 팔로의 차이를 설명하자 멘티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생들 오픈마인드 배워

물론 연장자, 성공한 선배라고 해서 멘티들에게 무조건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 회장은 “물고기를 잡아주거나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보다 아예 안 가르쳐주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고 말한다. 대신 8명의 대학생 멘티들은 ‘내 삶을 주제로 100자 쓰기’ 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목표에 대해 점차 스스로 찾아갈 수 있었다.

반면 이들 부부가 자식뻘의 멘티들로부터 배우는 것은 더 많았다. 이 회장은 “다양성과 오픈마인드”라고 요약했다. 멘티들은 기성세대에서 흑백이 명확히 갈리는 부분도 거침없이 토론했다. 특히 평소 조명에 관심이 많던 우영찬씨(성균관대 컴퓨터공학과 3년)은 ‘기분에 따라 변하는 조명’과 같은 아이디어를 제시해 이 회장을 기쁘게 했다.

특히 이들 부부의 멘티인 이재명씨(연세대 화학과 4년)는 삼성그룹에 입사해 이 회장을 놀라게 했다. 이씨는 삼성그룹 공채 52기로 공채 11기 선배인 이승한 회장의 까마득한 후배뻘이다. 이재명씨는 “인턴 때는 부장님만 봐도 허리를 90도로 숙였는데 이승한 회장과 멘토-멘티 관계를 맺고 있다니 처음에는 상상이 잘 안됐다”고 말했다.

2년간 자식뻘의 대학생들과 멘토-멘티 관계로 지낸 이 회장은 최근 고민도 생겼다. 모두 14명의 대학생들과 벌써 부모 자식 같은 정이 들었는데 새로운 학생들을 더 받아야 하냐는 고민이다. 이승한 회장은 “더 많은 학생을 멘티로 받아들이기보다 이들과 부모 자식 같은 관계를 더 다져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조선비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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